문학과지성사 40주년
문지, 단 한 권의 책

일상의 작은 깨달음

히메지독쿄대 교수 문춘금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고민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는 말을 부모로부터 또는 주위로부터 듣고 자랐다. 아이들을 인생의 최초의 위기라고도 할 수 있는 정체성의 혼란에 빠뜨린 부모와 이웃들은 사실의 진위도 밝혀주지 않은 채 웃고만 있으니……
한때 유행했던 유머 시리즈 중에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이 온 감자가 이웃 어른인 최불암을 찾아가 ‘나 감자 맞아?’ 하고 묻자 어처구니가 없어진 최불암이 그이 특유의 웃음인 ‘파!’로 대답을 대신하니 ‘역시 난 감자가 아니야’라며 울더라는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 아닌가!
예외 없이 주워온 아이였던 내가 ‘아! 그게 그 말이었구나’ 하고 그 비의祕義를 엿볼 수 있게 된 것은, 지금은 누구의 글이었던가도 기억나지 않지만 ‘만각유감晩覺有感’이라는 수필을 통해서였다.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는 서러운 말이, 그것도 멀리도 아닌 바로 동네 어귀나 마을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하니. 어린 소견에도 아이를 버리는 비정한 사람이 부모라는 끔찍스러운 출생의 비밀을 체념처럼 어렴풋한 기억으로 간직한 채 어느덧 어른이 되어, 어머니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뜻임을 알았다.
이것이 현실의 부모가 던져준 인생의 난문難問을 책이 해결해준 첫 기억인 것 같다. 아, 그렇구나! 그 ‘다리’의 비밀은 우리들의 유년기에 ‘누가 과연 나를 낳은 부모일까?’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통해 세상과의 관계를 다른 각도로도 보게끔 하는 통과의례와 같은 것으로서, 이웃 어른도 곧 우리의 부모이자 스승이기도 하다는 함의를 가르치기 위한 장치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네 조상님들은 한 생명이 태어나면 온 마을이 기뻐하며 잘 자라기를 기원하고, 한 해를 무사히 성장하면 잔칫상을 차리고 온 마을에 떡을 돌리며 감사하지 않았던가.
흔히 말속에는 문화가 녹아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한국어를 학생들과 같이 공부하다 보면 우리말과 글 속에서 우리 조상들이 자연과 인간을 어떻게 파악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어휘가 많은 것을 느낀다. 그중에서도 ‘나’와 ‘너’, ‘알’과 ‘얼’, ‘맛’과 ‘멋’ 등에서 보듯이 모음의 밝고 어두움의 차이만으로 뜻이 구별되는 말들이 지닌 의미의 유사성은 흥미롭다.
작가 이청준의 『키 작은 자유인』에 수록된 「숨은 손가락」에서, ‘나’와 ‘너’라는 두 인물간의 선악의 대립이 결국은 동일한 것일 수 있다는 암시는 차라리 무서울 따름이다.
「숨은 손가락」을 읽고 난 뒤의 소름 돋는 감동은 ‘내’ 속에 그토록 저주스러운 ‘네’가 있고, 그 ‘네’ 속에 ‘내’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우리 삶의 비의를 깨닫게 하는 이야기들을 통해 인간성을 이해하게 하고 인간으로 성장하게 해주는 작품은 동시에 사람으로 산다는 일의 쉽지 않음을 일깨워 준다. 작가 자신이 글 쓰는 일을 인생이라는 밤 산길을 가는 독행자를 위한 씨뿌리기라고  말한 대로, 특히 「숨은 손가락」의 주인공 동준의 비극적인 종말을 예견하는 다음 구절은 우리들로 하여금 ‘나’와 ‘너’의 관계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현우는 어쨌던 동준을 비호하여 그에게 일단 삶의 기회를 마련해준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우의 계략이었다. 그의 비호도 진실에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말대로 녀석은 그때까지 아직 진짜 흑색주의자는 못 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저 ‘자기 생존과 상승을 위한 전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결과는 어차피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미 죽음보다 더한 ‘손가락질’의 고통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준에게 목숨의 값으로 그것을 대신 시킨 것이었다. 그것을 몰랐던 것이 동준의 치명적인 어리석음이었다. 그래서 그는 괴롭고 욕되게 그의 연출을 따랐던 것이다. (217쪽)

『키 작은 자유인』에 같이 수록된 「바위 밑 음화와 양화」를 읽으며 문득 떠오른 내 주변의 ‘키 작은 자유인’의 이야기로 이 글을 맺고 싶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혈기만 왕성했지 아직 아이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애송이 후진에게 조용히 타이르듯 ‘그것이 아이 아니겠습니까’라던 동료 선생님. 평생을 시골학교의 평교사로 정년을 눈앞으로 맞이하신 그분의 우람한 체격과 수줍은 듯한 미소와 온화한 목소리로 언제나 ‘그것이 아이 아니겠습니까’라며 아이들을 다독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 사람 아니겠습니까’라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태도가 아닌가 생각해보며, 나 자신도 ‘키 작은 자유인’과 같이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과 세상에 대한 부끄러움을 귀히 여기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해본다.

 

문춘금(수정)문춘금(文春琴)
일본 히메지독쿄(姬路獨協)대학 외국어학부 교수. 「숨은 손가락」 「벌레 이야기」 등 이청준 소설을 일본어로 번역해 소개했으며, 대학 및 시민 강좌 등에서 한국문화와 한국어를 가르치며,  이청준 소설을 통해 한국인의 정서와 한국문학의 깊이를 이해하는 독자를 한 사람이라도 늘리고 싶어 한다.

문춘금이 고른 문지의 책
『숨은 손가락』(김치수 편, 이청준 외 지음)

『키 작은 자유인』(이청준)

 


김치수 외 엮음
카테고리 중단편소설 | 출간일 1985년 11월 20일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04쪽 | 가격 3,500원 | ISBN 2002194004053
이청준 지음
카테고리 중단편소설 | 출간일 1990년 11월 5일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81쪽 | 가격 6,500원 | ISBN 9788932004570
이청준 지음
카테고리 이청준 전집 | 출간일 2014년 5월 30일
사양 변형판 139x212 · 359쪽 | 가격 13,000원 | ISBN 978893202101

문지, 단 한 권의 책

각 분야 명사들이 꼽은 내 인생의 책.
책에 얽힌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문학과지성사의 책과 관련된 특별한 추억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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