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 40주년
문지, 단 한 권의 책

물질의 형상을 갖춘 절대 빈곤의 폭력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

『장난감 도시』는 오사카에서 태어난 1942년생 소설가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발표한 세 편의 중편소설을 하나로 엮은 연작소설이다. 개별 중편을 구성하는 19개, 18개, 16개의 짧은 삽화들은 열세 살 소년의 시선으로 1955년, 지방 도시 판자촌에 정착한 어느 가족의 1년간 행적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처음 이 소설을 읽은 것은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당시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한국 현대소설들을 걸신들린 듯이 읽어나가고 있었다.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단 다른 무엇보다 여름 더위를 피하는 데 도서관이 최적의 장소였다. 그곳은 기숙사 거주 학생이 원 없이 에어컨의 냉기를 만끽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으니까. 게다가 적은 비용으로 남아도는 시간을 죽이는데 소설 읽기만 한 게 없지 않은가? 확실히 그해 여름, 도서관 2층의 개가식 열람실 소파에 가장 편한 자세로 앉아 한국소설을 읽는 것은 세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힌다는 알리바이하에 인생을 낭비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런 판단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고교 입학 이후 줄곧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해온, 그리하여 어느덧 기숙사 5년 차를 맞이한 친구들 역시 도서관 구석구석의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난 학기 내내 대전 시내에 나가 최루가스를 들이마시고 돌아오는 일을 매일같이 반복한 터라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였다. 그들에게 도서관은 재활 장소나 다름없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1991년이었으니까 이런 일도 가능했으리라. 그해 봄, 많은 대학생들이 계속되는 죽음을 목격한 후 거리로 뛰쳐나갔지만, 남한 경제는 “3저 호황”의 끝물을 타고 국민소득 1만 불 시대를 향해 줄달음질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친구들은 “조국과 민족”의 미래를 근심할지언정, 자신의 앞날은 걱정하지는 않았다. 걱정은커녕 아예 관심을 꺼도 될 만큼 창창하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해 여름에 집어든 소설 중 『장난감 도시』는 베스트가 아니었다. 이 소설은 금세 잊혔고, 오히려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이나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 같은 소설들이 친구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다시 이 소설을 집어 든 것은 첫 독서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후였다. 당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3장, 「영웅시대―어느 강남 1세대의 회고담」을 쓰던 중이었다. 나는 이 장에서 1940년대 초반생으로 4.19세대에 속한 가상의 화자를 내세워, 그가 한국전쟁과 4.19혁명, 5.16쿠데타 등 역사적 격변을 거쳐 산업화의 주력 실무 세대로 성장하면서 아파트 기반의 중산층 문화를 일궈가는 과정을 살피고자 했다.
바로 이 화자의 소년기를 구상하기 위해 참고 문헌을 정리하다가 이 소설을 떠올렸다. 그때 다시 읽은 소설은 기억 속에 희미한 잔상으로 남아 있던 소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소설 초반부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으며 속으로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도시엔 세 부류의 인간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이 바닥 태생의 본토박이들과 전쟁 통에 쫓겨온 피난민들과 그리고, 우리 가족처럼 그다지 떳떳치 못한 이유로 고향을 등진 사람들과…….” (31쪽)

열세 살의 소년은 전학 간 학교 등교 첫날, 자신이 “미래의 면장감”에서 “아주 시시껄렁한 촌놈”으로 전락하는 것을 경험한 후, 단호한 태도로 도시의 주민들에 대한 유형학적 분류를 감행한다. 그리고 한 달 후에는 몇 마지기의 땅뙈기에 의지해 흙을 일구는 일 이외에 아무것도 해본 일이 없는 아버지의 무능을 확인한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물질의 형상을 갖춘 절대적 빈곤의 폭력 앞에서 가족의 몰락 과정을 천천히 지켜보는 것뿐이다. 도시에 대한 남달리 예민한 감각으로, 피붙이에 대한 동정과 연민 없이.
나는 이 소설 덕분에 육십대 나이에 뒤늦게 ‘수전노’로 변모한 1940년대 초반생 화자를 내세워 다음과 같은 자기변호의 문장을 써내려갈 수 있었다.

“태생이 벌레였던 (우리 세대, 인용자 주) 대다수에겐 생명의 존엄성이나 인간, 민주주의 같은 가치란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별나라 이야기였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한 것은 인간 세계로 향하는 사다리에게 발을 헛디뎌 다시 벌레들의 세계로 추락하는 것이었다. 나는 비굴함을 알지 못하는 비인칭의 용병이 되고자 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112쪽.)

이명박 씨가 집권에 성공한 지 2년째 되던 해의 일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장난감 도시』의 소설가보다 1년 앞서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고도성장기에 “샐러리맨의 성공 신화”를 일군 출세의 화신이었다.

박해천 2박해천
디자인 연구자, 동양대 교수.

박해천이 고른 문지의 책
『장난감 도시』(이동하)


이동하 지음
카테고리 문지 소설 명작선 | 출간일 2009년 12월 21일
사양 양장 · · 280쪽 | 가격 10,000원 | ISBN 9788932020235

문지, 단 한 권의 책

각 분야 명사들이 꼽은 내 인생의 책.
책에 얽힌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문학과지성사의 책과 관련된 특별한 추억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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