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 40주년
문지, 단 한 권의 책

매혹의 여러 얼굴들

웹툰 작가 미깡

어떤 책을 ‘단 한 권의 책’으로 꼽을지 제법 고민이 됐다.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는 책? (장르별로 있어서 하나만 고르기 어려운데) 기억 맨 밑바닥에 자리한 내 인생의 첫 책? (한희작 선생의 성인만화였던가?) 아니면 그냥 가장 최근에 읽은 책으로 할까? (이유식 책이잖아!) 온갖 잡동사니가 책등을 반쯤씩 가리고 있는 책장을 모처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습기 때문에 살짝 뒤틀리고 손때가 묻어 꼬질꼬질한 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머리맡에 두고 자주, 아니 거의 매일 뒤적이던 책. 술에 취해 들어와 화장은 안 지워도 이것만큼은 펼쳐서 단 몇 줄이라도 읽었던,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

박력이 넘치고 기승전결이 똑 떨어지는 이야기는 밥 먹는 걸 잊을 정도로 푹 빠져들곤 하지만 대개는 읽을 때뿐으로, 반복해서 열어보게 되진 않는다. ‘즐거웠어’ 하고는 책장으로 바이바이. 지나치게 어렵고 버거운 책도 손이 안 간다. (결코 오지 않는) ‘다음’을 기약하며 역시나 책장 속으로. 『은밀한 생』이 긴 시간 머리맡에 있었던 이유는 전자도 후자도 아닌, 대단히 알쏭달쏭한 책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장르부터 모호하다. 소설도 아니고 자서전도 아니고 사상서도 아닌데, 그 얼굴들이 모두 들어 있다. 손에 닿을 듯하면서도 어렵고, 어제는 분명 이해했던 내용이 오늘 와서 갑자기 얻어맞은 듯 깜깜해지기도 한다. 서사가 진행되나 싶으면 불현듯 수십 갈래 미로로 갈라져 뻗어간다. 리듬도 제각각이라 어떨 땐 단숨에 읽히고 어떨 땐 단어 하나에 하루 종일 발이 묶인다.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종으로 횡으로 인용되고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난해하면서도 너무 아름다워 한숨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주로 ‘사랑은……’ 으로 시작하는 짤막한 문장들을, 나는 열심히 노트에 옮겨 적곤 했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 말이다: (따로 표시를 하지 않았는데도 이 페이지들은 대번에 펼쳐졌다. 하도 길이 들어서.)

사랑은 결혼보다 더 중대한 계약이다. 사랑이 만들어내는 관계는 측근들이 만들어내는 관계와 모든 여타의 사회적 관계들에 대립된다. 상호간의 동의는 사랑에 충분치 못하다. 상호 간의 동의로 비밀의 공동체를 이루려면 비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열정은 공개될 수 없다. 그것은 공개될 수 없는 것이다. (199쪽)

감출 줄 모르는 자는 사랑할 줄 모른다. (313쪽)

사랑하는 사람들은 공모자들이다.
그것은 불타는 것이다. 함께 불타는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가는 것이 아니라, 대뜸 걷는 것이다. (317쪽)

사랑에는 선택이 부재한다. 사랑의 매혹에 빠지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곤 벼락이 떨어지는 순간에 불과하다. (235쪽)

사랑하는 두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보다 더 이 세상을 경멸하는 것도 없다. (474쪽)

아마도 20대 중반의 나는 책에 나오는 것과 같은 정열적이고 관능적인 사랑에 벼락 같이 빠져들고 싶었던 것 같다. 심하게 매혹되어 병이 나버리는 사랑, 완전히 비밀스럽고 영원한 사랑. 이 책을 닳도록 뒤적거렸던 건 그런 은밀한 바람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연애만 거듭하다 결국 ‘철저하게 사회적’이고 전혀 ‘은밀하지 않은’ 결혼을 했고, 이 책은 신혼집으로 이사한 날 머리맡을 떠나 처음으로 책장에 꽂혔다. 키냐르의 말대로라면 나는 이제 비밀이 없으니 영혼 또한 없는 인간이 돼버린 걸까? 시시하고 참담한 인간으로 전락해버린 걸까?

아닐 것이다. 아니고 싶다. 오랜만에 펼친 『은밀한 생』은 여전히 나를 사로잡는다. 예전과는 다른 지점에서 다른 느낌으로 가슴이 뛴다. 전에 내가 ‘사랑’이라는 단어만을 열심히 좇았다면, 이제는, 아니 이제야, 음악과 독서, 언어, 감각, 태초의 침묵, 어머니, 먼 옛날…… 에 대한 신비롭고 아름다운 문장들이 눈에 들어온다. 동그랗게 와서 안긴다. 어쩌면 이 책은 남녀 간의 열정적인 사랑만이 아니라 좀더 근원적인 사랑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게 아닐까? 사랑을 포함하여 삶의 어떤 황홀경의 순간들을 탐색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목이 늘어난 셔츠를 입고 이유식 책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지금, 가슴이 뛰지 말란 법은 없는 것이다.

하여 어젯밤 나는 이 책을 머리맡에 다시, 올려 놓았다.

미깡_프로필


프로필 수정

미깡
프리랜서 작가. 2014년 4월부터 Daum 웹툰에 「술꾼도시처녀들」을 연재하고 있다.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어 있다.

미깡이 고른 문지의 책
『은밀한 생』(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파스칼 키냐르 지음|송의경 옮김
카테고리 외국소설 | 출간일 2001년 7월 12일
사양 양장 · 신국판 152x225mm · 484쪽 | 가격 13,000원 | ISBN 9788932012636

문지, 단 한 권의 책

각 분야 명사들이 꼽은 내 인생의 책.
책에 얽힌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문학과지성사의 책과 관련된 특별한 추억을 공유합니다.
[인터뷰] 당신의 책을 만나다
뮤지션 김목인×문학평론가 김나영
[서평] 김현은 예외다
평화학 ·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
[인터뷰] 회의주의 잡지를 읽는 싱어송라이터
뮤지션 · 에세이스트 정바비
[서평] 축사
영화평론가 · 영화감독 정성일
[인터뷰] 책은 서로를 열어둔 연애
영화감독 윤성호
[서평] 체질이 상처인 시인이 있었다
요리사 · 음식칼럼니스트 박찬일
[인터뷰] 헌책은 책들의 엑기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장 윤성근
[서평] 단 하나의 삶, 단 하나의 소설
전 『프레시안』 기자 안은별
[인터뷰] 'thanks to'에 넣고 싶은 작가들
영화감독 변영주
[서평]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대중음악평론가 차우진
[인터뷰] 무중력 사회에 띄워 보낸 책
유자살롱 공동대표 아키
[서평] 좌표 수정의 좌표
뮤지션 한받
[인터뷰] 책은 인생의 터닝포인트다
기생충 박사 서민
[서평] 매혹의 여러 얼굴들
웹툰 작가 미깡
[인터뷰] 힘센 말은 어디에서 오는가
문학평론가 ‧ 번역가 황현산
[서평] 물질의 형상을 갖춘 절대 빈곤의 폭력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
[서평] [40주년 창립기념 특집] 문지, 단 한 권의 책 인터뷰 · 서평
[인터뷰] 서점이 아니라 책방
풀무질 지기 은종복
[서평] 일상의 작은 깨달음
히메지독쿄대 교수 문춘금
[인터뷰] 그곳에는 그럴듯한 게 있다
워크룸 공동대표 김형진
[인터뷰] 사람은 귀로 읽는 책이다
「네시이십분 라디오」 제작자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