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표 수정의 좌표
뮤지션 한받
저라는 사람은, 매체의 선택을 통해 내 안으로 들어오는 이야기를 안에 축적하지 않고 흘러가버리게 놔두는 것 같습니다. 기억이나 마음에 남았으면 하는 것을 악착같이 기록으로 남기지 않습니다. 굳이 기록하지 않아도, 기억하지 않아도, 몸 안에 남은 것이 있다면 분명히 어떠한 작동을 제 안에서 하리라 생각하며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이번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문지, 단 한 권의 책」 청탁을 받고 계속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문지의 어떤 책을 읽었던가?
우선 시간을 제한해봤습니다. 어린 시절인 1980년대부터 서울에 온 2003년까지 문지의 책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책을 읽고 써둔 독서기나 구체적인 기록, 메모가 없으니 어떤 책을 읽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서 인터넷서점을 방문하여 ‘문학과지성사’로 검색한 뒤 나온 결과물인 2,745권의 책 가운데 이 기간에 출간된 책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맨끝 페이지, 과거에서부터 거슬러 올라오면서 보니 1989년에 출간된 『입 속의 검은 잎』이 눈에 띕니다. 감히 이야기해보자면 우리 세대에 이 시집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저만 해도 제가 짓는 노랫말에 기형도의 언어들이 어떤 영향을 주고 있으니까요. 김현철의 「진눈깨비」(원곡 조동진) 같은 노래를 들어도 기형도 시인의 시가 생각나더라고요.
1990년대 들어 저의 취향은 신기하게도 같은 시대가 아닌 일제강점기로 자꾸 뒷걸음질을 칩니다. 도서관에 가면 1995년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던 두 무라카미의 책들과 동시대 시인들의 시집이 수십 권씩 나열되어 있었지만 저는 그 책장을 당연하듯 지나쳐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집이 꽂힌 곳으로 가서 한나절을 보내곤 했습니다.
계속 클릭을 거듭하다 보니 이번에는 새까맣게 잊었던 오규원 선생님의 『현대시작법』도 눈에 띕니다. 대학 초년생, 프레시한 제가 시를 써보려 할 때 참조했던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러분께 소개할 책은 바로 『다다/쉬르레알리슴 선언』입니다. 잊고 있었지만, 혼란스럽던 시기에 상당히 많은 영감을 얻은 책입니다. 제게 내려진 강령처럼 여기며 한동안 품에 안고 다녔던 듯합니다. 어쨌거나 덕분에 저는, 1996년 기타를 들어 이상한 노래(예를 들어 신라면 봉지 뒤편에 씌어져 있는 조리법을 그대로 따라 부르는 「신라면 조리법」)를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고, 1997년엔 『SURR-(수르)』라는 잡지를 한 권 만들기도 했습니다.

1인 잡지 『SURR-』 표지(1996)
이러한 방향으로의 시작은 중학생 때 TV에서 본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였습니다. 왜 좋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곤란하지만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은 ‘고도’를 기다리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았죠. 그때 이후로 부조리하고 합리적이지 않으며, 비논리적이고 무의미한 재미를 지향하면서도 동시에 저항적인 것에 대해 관심이 갔습니다. 다다이즘은 제 삶의 태도이자 방향이고 강령과도 같습니다. 또한 ‘말’을 가지고 놀 수 있으니 삶의 유일한 낙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 책을 통해 받은 다다이즘의 세례는 지금까지의 제 삶, 특히나 음악 활동에 강한 영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저는 특히 언어를 발화할 때의 발음과 이미지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우연히 생성된 엉성하고도 어색한 조합이 성공을 거두면 전혀 다른 세계가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아마츄어증폭기(=아마츄어+증폭기)가, 최근엔 야마가타 트윅스터(=야마가타+트윅스터)가 그렇습니다. 두 단어를 조합했을 뿐인데 새로운 세계가 제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언어들을 무작위로 조합해가면서 세계를 구축해내고, 그다음 그 세계 속에서 보이는 것들을 노래를 만드는 겁니다. 『다다/쉬르레알리슴 선언』은 제게 그러한 시도를 할 수 있도록 좌표를 알려준 책이었습니다.
서울로 올라오고 난 뒤, 서울의 시립도서관들을 순례하며 빌린 4,000여 권의 책들, 그 책들을 빌리러 가고 다시 돌려주러 가는 그 길에서 본 많은 것들, 책을 읽고 나서, 책과 함께 하는 서울의 풍경을 통과하며 내 안에 남은 것은 무엇인지 정확히 말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지금 현재의 나의 활동으로 나아가게끔 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 손에 쥔 장 뤽 낭시의 책 『나를 만지지 마라』를 읽으면서도 어떤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런 작은 깨달음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음 좌표도 기대합니다. 문학과 지성사의 책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받
싱어송라이터.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아마츄어 증폭기’로, 이후 ‘야마가타 트윅스터’로 활동하고 있다. ‘인디’를 벗어난 ‘자립음악가’가 되어 ‘민중엔터테이너’로 거듭나기를 꿈꾸고 있다.
『탐욕 소년 표류기』를 썼다.
한받이 고른 문지의 책
『다다/쉬르레알리즘』(트리스탕 자라 외 지음, 송재영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