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 40주년
문지, 단 한 권의 책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대중음악평론가 차우진

아이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10대들이 우왕좌왕하면서 제 갈 길을 찾는 이야기, 거기서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는 이야기, 어쨌든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에는 그저 무장 해제되고 만다. 만화든 영화든 소설이든 르포르타주든 소위 ‘성장담’이라 불리는 이야기에 나는 약하다. 『자메이카의 열풍』도 그중 하나다.

이 소설에는 에밀리라는 아이가 나온다. 자메이카에서 영국으로 떠나는 배를 또래들과 함께 탄 이 아이는 쿠바 인근에서 해적들에게 납치를 당한다. 『보물섬』이나 『파리대왕』이 생각나는 설정이다. 아이들은 자연스레 해적들과 가까워지고 협조까지 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18세기 해적왕과 떠나는 모험 가득한 여행기’처럼 들린다. 아니다. 이 소설은 이런 모험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해적은 해적이고 아이는 아이다. 어른들은 악하고 또한 멍청하고 아이들은 해맑고 또한 영악하다. 열 살의 소녀는 아이 같기도 하고 어른 같기도 하다. 여기에 피터팬의 동화적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여기에 매혹당했다.

별 생각없이, 우리는 ‘아이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성장담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성장이란 무엇인가. 내 생각에 그것은, 다음 챕터로 넘어가는 것이다. 1장에서 2장으로, 5장에서 6장으로 넘어가는 것. 그 사이에 우리는 어떤 교훈을, 성찰을 얻게 된다. 그게 아니라면 다음 장을 넘기는 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때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성장을 곧 어떤 결과적인 상태로 여기는 것이다. 번데기에서 성충으로 거듭나듯 성장은 스펙터클한 결과로 여겨진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성장이란 하나의 장에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게 맞는 것일까.

『자메이카의 열풍』을 읽은 사람들은 에밀리의 ‘모험’을 아이들에 빗댄 어른들의 우화로 읽을지 모른다. 혹은 극단적인 환경에 놓인 인간의 본성이란 아이든 어른이든 동일한 것이라고 읽을지도 모르겠다. 내게 이 소설은 성장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는 계기였던 것 같다. 성장이란 한 챕터에서 다음 챕터로 넘어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것, 한 장의 챕터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것, 성장을 스펙터클이라는 신화로 이해하는 대신 연속적이고 유기적인 관계와 맥락에서 작동하는 선택의 문제라는 것. 요컨대 『자메이카의 열풍』은 내가 어른이 되는 사이에 관습화된 사고방식에 질문을 던진다.

질문을 던지는 것. 나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질문이 겨냥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그것은 방향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 것보다 이것은 어디를 향하는가, 혹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 것. 질문이란 그런 방향을 물을 때 보다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자메이카의 열풍』은 다층적으로 읽히는 이야기이고 이 겹겹이 쌓인 레이어는 맥락을 들여다보게 한다.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나는 어째서 어른이어야 하는가. 나는 왜 성장의 감각과 분리되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하루를 보내게 된다.

문학과지성사의 책을 처음 읽은 건 아마도 20여 년 전의 일일 것이다. 그때는 시집이든 소설이든 닥치는 대로 읽었다. 문장과 단어에 매료되고 언젠가 이 출판사의 카탈로그에 내 글을 싣고 싶다는 하릴없는 욕망을 품기도 했다. 그런 시절을 지나 ‘문지’의 책을 다시 읽으면서 그때를 되돌아본다. 그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리 왔을까. 이 질문에 답하는 건 의외로 쉬울지도 모르겠고, 혹은 은근히 어려울 수도 있겠다. 다만 나는 문지이므로 『자메이카의 열풍』과 같은 책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 나는 어떻게 과거와 결별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이런 질문을 하게 해줘서 고마울 뿐이다.

차우진

차우진
대중음악평론가. 음악웹진 『weiv』를 비롯해 『씨네21』 『한겨레21』 『GQ』 『NYLON』 등의 매체에 기고하며 활발히 활동해왔다. 『청춘의 사운드』 등의 단행본을 펴냈다.

차우진이 고른 문지의 책
『자메이카의 열풍』(리처드 휴스 지음, 김석희 옮김)


리처드 휴스 지음 | 김석희 옮김
카테고리 문지 푸른 문학 | 출간일 2014년 10월 30일
사양 변형판 137x210 · 314쪽 | 가격 11,000원 | ISBN 9788932026688

문지, 단 한 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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