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 40주년
문지, 단 한 권의 책

‘thanks to’에 넣고 싶은 작가들

영화감독 변영주

변영주 김목인 1

인터뷰 · 정리 김목인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번 인터뷰는 준비 단계부터 유독 긴장이 되었다. 작품들만 체크하고 가기에는 변영주 감독의 경력과 활동의 폭이 너무 넓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인터뷰 당일에도 검색되는 새로운 기사들이 있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부담만 커질 뿐이었다. 약속 장소에 조금 일찍 나가보니, 변영주 감독은 이미 일찍 도착해 문지 직원들과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원래 알던 사이인가 보다 했는데 전혀 아니라고 했다. 이런 게 감독의 포스일까. 나와의 인터뷰도 그렇게, 별다른 서두 없이 원래 알던 사이처럼 시작되었다.

 

김목인(이하 김): 새로 준비 중이신 작업 얘기 좀 해주세요. 궁금합니다.
변영주(이하 변): 2012년에 「화차」를 끝내놓고 원작 두 편을 각색하기 시작했어요. 하나는 강풀의 웹툰 『조명가게』였고, 다른 하나는 「화차」의 원작자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인 『이유』였는데, 『이유』가 먼저 시나리오가 나와 내년에 들어가게 될 것 같아요. 이제 세상에서 제일 힘든 작업을 시작해야죠. 캐스팅. 저는 이 기간을 ‘거절의 계절’이라고 부르는데, 거절에 유연해지려고 심장을 두텁게 만드는 중입니다.

: 두 원작의 어떤 점이 매력적이셨나요?
변: 『조명가게』는 예전부터 응급실과 대형사고, 삶과 죽음의 경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마침 딱 들어맞았어요. 『이유』는 그 안에 제가 언제나 매료되는 캐릭터, 후회하는 중년 남자가 있었고요. (웃음) 모든 걸 다시 시작하고 싶어 하는 캐릭터 말이죠. 일단 강하게 매료된 것에서 출발해 나머지를 대폭 바꾸었는데, 많이 다를 거예요. 원작을 사랑하시는 분들께는 좀 죄송하죠.

: 원작이 있는 영화에 항상 따라붙는 불평 아닐까요?
변: 저는 원작을 읽은 후 독후감을 영화로 만드는 거라 생각해요. 영화를 보고 ‘원작과 조금 다르지만 보고 난 느낌은 닮았어’라고 느끼신다면 독후감이 꽤 잘된 거라 생각하고요. 원작자에게도 아예 미리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아요. “다 바꿔도 될까요? 제목도 바꿀지 몰라요.” 두 분 모두 마음대로 하라고 하셔서 시작할 수 있었어요.

책들 1

: ‘단 한권의 책’을 여러 권 고르셨어요. (웃음) 우선 두 권 먼저 설명해주신다면?
변: 『비명을 찾아서』는 작가 복거일을 골랐다기보다 한국 소설로 SF를 읽게 해줬던 최초의 쾌감, 신선함 때문에 골랐어요. 오정희는 『불의 강』이어도 되고 『유년의 뜰』이어도 돼요. 사실 어느 작품이든 상관없었어요.

: 오정희 작가는 어떤 방대한 흐름의 입구로 선택하신 거군요?
변: 그렇죠. 저는 종종 90년대의 한국말[語]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생각하곤 해요. 박완서, 오정희, 김채원이 아직 활발히 활동하는 상황에서 공지영, 은희경, 전경린 같은 작가들까지 활동했으니까요.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세대와 광주를 기억하는 세대가 비슷한 시기에 풍성하게 서로 다른 문장들을 만들어낸 셈이죠. 특히 앞의 세 작가들의 경우, 그들이 얼마나 고마운 언니들이었고, 그들의 책을 통해 우리의 경험이 얼마나 확장되었나 자주 생각해요. 저에게 영화의 ‘thanks to’에 넣고 싶은 대로 다 넣으라면 제 모든 영화에 그 이름들을 넣고 싶을 정도입니다.

: 저는 오정희나 박완서의 작품들을 좀더 뒤에 읽은 세대라, 당대에 주었던 영향력이 어떤 느낌이었을까 항상 궁금했어요.
변: 글쎄요. 한 가지 예를 들면, 그때는 지금 젊은 세대들보다 부모 세대와 훨씬 더 날카롭게 각을 세웠던 것 같아요. 저만 해도 한국전쟁을 겪으며 성장한 부모 밑에서 자라 한 번도 아버지 세대를 이해했던 적이 없었어요. 언제나 지겹고 끔찍했는데 솔직히 박완서나 오정희의 글 덕분에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아, 저 세대는 시체더미 안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이구나. 청춘의 나이에 살아남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던 사람들이구나.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에 나오는 말도 안 되게 허름한 포장마차의 말도 안 되는 카바이드 불빛 아래 술을 마시며 낭만을 토로하는 청춘들. 오정희의 『유년의 뜰』에 나오는, 교장실에서 케이크를 먹고 화장실에서 막 토하는 주인공. 아버지께 그랬죠. ‘이제 아버지를 안 미워하게 될 것 같아요.’ 웃기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웃음)

: 오정희의 불의 강을 읽으며 정말 그 시대의 작품만이 갖고 있는 폐허의 느낌을 받았는데, 화자는 어쩌면 그렇게 현대적이고 세련되었을까 놀라웠어요.
변: ‘이런 문장을 구축하다니, 난 역시 소비자야’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문장들이죠. 단편 「완구점 여인」만 해도 도망간 새어머니에 소아마비로 죽은 남동생에 말도 안 되는 암울한 상황인데도 그 안에서 여자아이가 낭만을 꿈꾸잖아요. 죄의식과 욕망 등이 촘촘하게 쌓여 있는 문장들. 나라면 그런 문장을 구축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거죠. 평론가들이 흔히 말하잖아요. ‘여성적 글쓰기.’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에요. 세상의 여성들이 모두 동일한 교육과 동일한 환경에서 자라 19세에 사회로 진출하는 게 아니니까요. 개별의 경험, 개별의 글쓰기가 있는 법인데, 그 안에서 ‘여성의 글쓰기’ ‘여성의 경험’이라고 상징할 수 있는 글을 썼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거예요. 박완서의 『나목』을 읽다 어느 날 오정희의 『유년의 뜰』을 읽으면, 주인공들이 자매 같다는 착각이 들어요. 『나목』의 외동딸 밑에 사실은 딸이 둘 더 있어, 그중 하나가 『유년의 뜰』의 그 녀석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거죠.

변영주

: 비명을 찾아서를 고른 이유를 얘기하시면서 SF를 언급하셨는데, 원래 그쪽에도 관심이 많으셨나요? 어딘가에서 「스타워즈」의 오마주를 만들고 싶다는 인터뷰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웃음)
변: 문학보다는 영화로 좋아했죠. 그러다가 서른 즈음에 빠져들었어요. 역사물을 좋아하는 경향도 있고 하니 『은하영웅전설』 같은 유도 좋아했고요. SF 중 좀 마이너한 계열이지만 대체역사 장르도 좋아했는데, 『비명을 찾아서』는 그런 점에서 척척 붙었던 것 같아요. 굳이 비교하면 로버트 해리스의 『당신들의 조국』(2차 세계대전의 결과를 다르게 가정한 대체역사물)보다 훨씬 더 정교한 장르소설이라고 생각해요.

: 정교하다는 것은 설정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변: 완결성이죠. 주인공이 조선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고도 여전히 일본어를 못 버리잖아요. 결국 부인이 헌병과 바람나고 자신은 모든 걸 다 잃었을 때에서야 버리게 되죠.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졌을 때 버리고 그 다음 길을 가는 그런 설득력 있는 완결성이 좋았어요. 저는 SF도 끊임없이 현실을 떠올리게 할 때 훌륭하다고 느껴요. 초반부에 포장마차 아줌마에 대한 묘사가 나오잖아요. 주인공이 ‘우리는 왜 다를까?’ ‘우리는 왜 말투가 다르지?’라고 질문할 때 저는 제가 느꼈던 우울함, 정체성 없음, 부모 세대와의 단절감 같은 게 계속 떠올랐어요. 사실 많은 경우, 절정 부분보다 그런 지나가는 장면들이 울림을 주죠.

: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을 고르신 계기도 들려주세요.
변: 「낮은 목소리」 만들 무렵 읽었는데, ‘아, 정말 새로운 시대가 왔구나.’ 생각했어요. 이제 사람들이 계급 밑에 숨어 있지 않는 시대가 왔구나…… 또 이 시집의 장면들은 인생의 많은 순간과 겹쳐지는 것도 같아요. 그럴 때 있지 않아요? 어디서 경험했었나 가물가물한데 책에서 봤던 장면이었던 경우. 제 경우 불광동에 사는데, 터프한 할아버지들 되게 많으세요. 트로트 막 크게 시끄럽게 틀어놓고 소리 지르고. 어느 날 ‘아 싫다, 저것도 싫고 이것도 싫고 다 싫구나’ 싶을 때가 있는데, 문득 사람들은 나의 어떤 점을 싫어할까 반추하게 돼요. 그러다 보면 좀 전에 싫어했던 것이 부끄러워지며, 문득 기형도의 「늙은 사람」에도 이 장면이 있었구나 떠오르는 거죠. 내가 살아온 삶은 요만큼인데, 이만큼 살았다고 느끼게 해주는 게 문학의 재미있는 점이라고 생각해요.

변영주 2

: 제가 인터뷰 장소에 도착했을 때, 이북(e-book) 얘기를 하고 계셨는데 어떤 내용이었죠?
변: 출판사들이 이북에 대해 훨씬 선제적인 태도를 보였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냥 종이책과 똑같은 파일을 이미지로 올리는 것 말고, 이북이기에 가능한 것들을 좀더 활발히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모든 소비 방식이 새로워진 상황에서 글 읽는 방식은 왜 새로워지지 않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혹시라도 글 읽는 방식이 새로워져 좀더 많은 친구들이 문학을 친근하게 향유하게 된다면 그것처럼 신나는 일이 없지 않겠어요?

: 책의 물성에 대한 애정을 비롯해 여러 이유들이 있는 것 같아요.
변: 얼마 전에도 정혜윤 PD와 이북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자기는 이북이 절대로 싫대요. 책장을 넘기며 읽는 절차가 무시당하는 느낌이라나. 제가 그랬죠. 이북으로도 그 느낌 유지할 수 있어, 침 묻혀 넘길 수도 있고. (웃음)

(우린 잠시 태블릿으로 변영주 감독이 저장해놓은 이북들을 구경했다.)

: 최근에 이북으로는 어떤 작품들 읽고 있으신가요?
변: 『가시나무새』의 작가(콜린 매컬로)가 쓴 『로마의 일인자』를 읽고 있어요. 로마 제국을 다룬 역사물인데, 완역본이 나오면서 이북도 같이 나와 ‘아 착하다’ 했죠. 재미있어요. 저는 다시 태어나면 친환경적인 동물원의 나무늘보로 태어나든가 아니면 카이사르의 노예로 태어나고 싶다고 얘기하곤 해요. 서기 역할을 하는 노예. 『갈리아 전기』를 제가 쓴다고 상상해보세요. 너무나 행복하지 않겠어요? 무언가를 지켜본다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잖아요. 제가 언제나 역사에 매료되는 것도, 영화를 하는 것도 결국 지켜보는 일이라 그런 것 같아요.

: 이제 곧 캐스팅도 들어가셔야 할 텐데 영화 만드는 게 결코 지켜보는 일만은 아닌 것 같아요.
변: 그렇죠. 시나리오를 쓰던 근 1년 반이 독자로서는 무척 메마른 시기였어요. 뭔가를 읽는 시기가 아니라 룸펜처럼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말투나 행동을 구경하는 시기였으니까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언제나 시장에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야 경험도 확장되고. 하지만 소비자로서의 자신도 되게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영화감독으로 계속 활동하는 것과 문학, 음악, 영화들을 즐기는 것’ 중 하나만 택하라면 저는 당연히 후자를 고를 거예요. 창작할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지만,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잡식성 문화 소비자인 ‘나’가 있기 때문이니까요. 은퇴하고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책 한 권 놓고 상상에 잠겨 해가 저문다면 너무나 신나지 않겠어요?


이날은 긴장하고 나갔던 것이 무색하게, 끝나고 술도 한잔했다. 덕분에 굵직한 사회 문제들부터 단편소설에 나올 법한 희한한 인물들, 얼마 전 다녀온 제주의 맛집들까지 조목조목 명쾌하고 쿨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인터뷰 글은 훨씬 더 길고 풍성했던 그날의 ‘원작’ 대화들의 일부만 각색한 것임을 밝혀둔다.

“깎자는 얘기는 꺼낼 수도 없었다. 주인은 이미 그가 그 책을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비명을 찾아서』 상권, 168쪽.

 

DSC_0437변영주
영화감독. 1993년 다큐멘터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으로 데뷔. 「낮은 목소리」 시리즈로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다.
장편영화 「밀애」 「발레교습소」 「화차」 등을 연출했으며, 차기작 「이유」를 준비 중이다.

변영주가 고른 문지의 책

『비명을 찾아서』(복거일)
『불의 강』(오정희)
『유년의 뜰』(오정희)
『입속의 검은 잎』(기형도)

 

 


오정희 지음
카테고리 문지 소설 명작선 | 출간일 1995년 4월 20일
사양 신국판 152x225mm · 270쪽 | 가격 10,000원 | ISBN 9788932009384
복거일 지음
카테고리 문지 소설 명작선 | 출간일 1998년 1월 20일
사양 신국판 152x225mm · 전2권쪽 | 가격 19,000원 | ISBN
기형도 지음
카테고리 문학과지성 시인선 | 출간일 1989년 5월 30일
사양 신46판 176x248mm · 159쪽 | 가격 8,000원 | ISBN 9788932003979
오정희 지음
카테고리 문지 소설 명작선 | 출간일 1998년 4월 20일
사양 신국판 152x225mm · 295쪽 | 가격 11,000원 | ISBN 9788932009872

문지, 단 한 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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