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깊은 집이라는 흑백 풍경들

김원일 작가의 소설『마당 깊은 집』배경인 대구 중구 장관동에 <마당깊은 집 문학관>이 지난 2019년 3월 6일 개관하였습니다. 문학관을 먼저 살펴보고 온 송재학 시인의 사진과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김원일 작가의 소설과 만나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글, 사진 송재학(시인)

군방각(群芳閣)에서 소설 공간『마당 깊은 집』(대구 중구 약령길 33-10)의 관람을 시작하는 것은 『마당 깊은 집』을 전시 공간으로만 제한한다면, 생동하는 현장감을 대체로 지나쳐버리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길남이가 가출을 하여 대구역 대합실에서 “의자 가장자리 시멘트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 사이에 귀싸대기까지 박고”(222) 풋잠을 들었을 때 어머니가 찾아와서 길남이를 말없이 집으로 데려가는 부분이다. 그때 어머니와 길남이 사이의 화해와 갈등은 상처가 아물듯이 흔적을 남기며 봉합된다. 언제나 답사가 가능한 대구역 대합실 또한 주요한 소설 공간이 아닌가.

 

 

 

 

 

 

 

 

 

 

 

 

 

 

 

 

 

 

 

 

 

 

소설 『마당 깊은 집』의 서두에 길남이네 식구가 살았던 “약전골목과 중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종로통을 낀 장관동”(7쪽)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마당 깊은 집에 바깥마당과 안마당이 있었다면 마당 깊은 집 밖으로 근대의 다채로운 마당이 여러모로 가세했다. “약전골목에서 직각으로 꺽어 종로통으로 내려가”는 곳에 있는 군방각은 당시 대구의 가장 큰 청요릿집이었다. 소설 끝머리에 나오는 주인집의 파티에도 길남이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군방각의 요리가 등장한다. 대구의 첫 중화요릿집인 군방각의 변화는 근현대의 그림자를 닮는다. 으리으리한 청요릿집은 이름을 바꾸어가며 한때는 호텔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모백화점의 주차장으로 변신했다. 군방각이 있던 종로는 당시 대구 화교들의 세거지였다. 군방각을 비롯하여 대구화교소학교가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있고 화교를 상대로 하는 잡화상인 화상 공회, 영생덕, 복해 반점 등의 요릿집이 자리했다. 옛 군방각 건물 앞에 『마당 깊은 집』과 작가 김원일을 가리키는 표시판이 있다. 실제로 작가가 살았던 마당 깊은 집은 군방각 옆 골목을 따라 소설에서 묘사된 바 그대로 “장관동을 남북으로 비스듬히 뚫어 약전골목에서 종로로 빠져나가는 그 긴 골목 중간쯤”(8쪽)이다. 좁은 골목을 따라가니까 아니나 다를까 마당 깊은 집의 현장을 안내하는 표시판이 있다.

 

 

 

 

 

 

 

 

 

 

 

 

 

 

 

 

 

 

 

 

 

 

대구 중구청에서 오래전부터 심혈을 기울이는 <근대로의 여행>이라는 스토리텔링 속에 『마당 깊은 집』이 온전하게 들어와 자리매김하는 것이 어찌 반갑고 다행스럽지 않으랴. 대구 중구의 골목 투어인 <근대로의 여행>은 소설『마당 깊은 집』의 빼곡한 전후사이기도 하다. 5개의 코스가 있는 이 투어의 2코스인 근대문화골목(1.64킬로미터, 탐방 소요시간 2시간)은 동산 선교사 주택에서 시작하여 3·1 만세 운동길, 계산성당, 이상화·서상돈 고택, 뽕나무 골목, YMCA 옛 건물, 에코 한방 웰빙 체험관, 제일교회 역사관, 약령시 한의약박물관, 영남대로, 종로, 진골목, 화교협회라는 풍성한 콘텐츠를 뽐내고 있다.
긴 골목을 빠져나오니 『마당 깊은 집』을 상징한 길남의 동상과 소설 및 약령시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산뜻한 돌조각과 마주친다. 그리고 “길 양쪽으로는 단층 기와집에 유리 문짝을 내단 약제 도매상과 한약방이 즐비”(13쪽)했던 약전골목의 풍경이 아직도 희미하게 소설의 구절을 실천하는 중이다. 낮은 단층 건물들이 약업사의 간판을 여태 짊어지고 애써 태연한 척 자리 지키는 것을 보는 것도 덤이라 하겠다.

 

 

 

 

 

 

 

 

 

 

 

 

 

 

 

 

 

 

 

 

 

 

매일신문사의 좌측 담장을 길게 포옹하듯 껴안은 조브장한 골목은 지금도 한옥집이 즐비하다. 그 집들은 대체로 어탕이나 추어탕 혹은 홍합밥을 파는 식당으로 변모하긴 했지만, 길남이가 와서 보았다면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네라고 싱긋 웃었을 모습이다. 그 골목 끄트머리쯤, 그러니까 이상화·서상돈 고택으로 가기 전에 『마당 깊은 집』의 다정한 표시판을 만나게 된다. 왼쪽으로 더 좁은 골목이 있고 막다른 곳에 예의 『마당 깊은 집』의 솟을대문을 만나게 된다.
물론 “한쪽 처마가 기우뚱 내려앉아 있었던”(15쪽) 솟을대문 대신 어깨가 갸름한 나무 대문이다. 하지만 중문에 걸린 마당 깊은 집이라는 현판은 뭉클하다. 마당으로 성큼 들어서면 기역자 한옥 건물이 단아하다. 세월이 흘러 이 건물들이 적당히 늙어가면 이 공간 또한 점차 의미를 발휘할 것이라고 믿어진다. 건물 내부의 전시공간은 오밀조밀하게 구성되었다. 이 공간의 조성과정과 길남 어머니의 인생 어록 등이 1950년대 시대의 증언들이라는 타이틀로 소개되기도 했고, 또 소설의 전체 줄거리와 많은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 그리고 독특하게 <길남이네 방>과 <김원일 작가의 방>으로 나뉘어 있다. 소설을 읽고 왔다면 누구나 여기에서 전후의 비극과 비애에 젖어들 수 있으리라.
“다섯 식구가 누우면 방 안이 거의 찼”(18쪽)던, 분갑만 한 〈길남이네 방〉은 “쪽마루 앞 한켠에 판자로 한 평 정도의 가건물을 내 키만 한 높이로 짓고 루핑을 덮어 부엌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방은 장이나 다락이 없어 편리하게 쓰도록 선반을 달아 잡동사니 물건을 얹었”(18쪽)던 모습 그대로이다. 길남이네 어머니가 사용했던 재봉틀과 밥상과 선반과 이불이 그 시절 그 세월 그대로 붙박이처럼 보인다.
<김원일 작가의 방>은 작가의 서재를 재현함과 동시에 그의 작품 세계를 요약해서 드러내고 있다. 김원일의 소설집 『어둠의 혼』(단편 1973년 발표. 단행본 1984년 발행), 『겨울 골짜기』(1987년 발행), 『불의 제전』(1983년 발행) 등 거의 모든 작품을 자세히 챙긴 서가가 있고, 김원일 부모님의 사진, 직접 그린 그림, 작가의 컬렉션 일부가 전시되었다. 그리고 작가 인터뷰 영상과 작가가 사용했던 예전의 컴퓨터 또한 역할을 맡았다. 그곳에서 분단문학에 필생을 헌신한 작가의 무겁고 아픈 정신과 마주친다. 마당 깊은 집의 미니어처도 있는데, 정밀한 고증 없이 제작되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김천댁이 머물던 가겟방이 사라진 것 외에도 위채와 아래채, 바깥마당과 안마당의 사이즈가 소설과 전혀 아퀴가 맞지 않다.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지만 소설『마당 깊은 집』에서 반드시 짚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어느 페이지에서나 잘 녹아든 우리말 어휘들이 구축한 세계이다. 그 언어들에 기대어 소설 『마당 깊은 집』은 1950년대의 흑백 풍경을 섬세하고 풍요롭게 복원한다. 예컨대, ‘눈흘김, 동두깨비, 분갑만 한 방, 아귀찬 마지막 말, 더껑이 구름, 힘답없이 웃었다, 곰바지런했다, 앙가발이걸음, 오도카니, 배들배들, 왜무 같은 껑충다리, 지청구, 왜자기지, 등심이 떨리도록 울었다, 엊지게 얹어, 째려보는 옴팡눈, 다리쉼, 아등바등, 뉘엿이 기울 때면, 아귀세었다, 개골창, 통나무가리, 중동무이, 흐물쩍 웃었다, 난든집 솜씨였다, 깜조록이 절었고, 번지레 젖은 채, 구시렁거림, 보짱을 부릴 성싶지 않았다, 땡고함, 풀죽 같은 성질, 찬바람에 귀는 닭볏이 되어, 수꿀해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팔초하게 생긴, 소로시 나타났다, 머리가 짜브라져라 이고 돌아오던, 똬리로 썼던 수건’ 등은 쉽사리 마주치는 말은 아니지만, 우리말이기에 어렴풋이 짐작이 가능하다. 작품마다 우리말 채집에 지극함을 쏟은 작가에게 정성이 지극하다는 절곡, 매우 정성스럽다는 곡절, 마음이 정성스럽다는 극진이라는 말들이 무시로 만져진다.
전시공간 밖으로 나오니 3월의 으슬으슬 꽃샘추위가 다가왔다. 그 추위는 소설 속에서 경기댁, 평양댁, 일남이네 아래채 사람들이 방을 비우지 않으려고 부리나케 서로 장작더미를 들여놓던 장면과 곧장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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