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한 모랄리스트의 탄생과 사상 – 『수평선 너머에서』 (김성우 단장집) 세상을 보다

노재봉 (정치학자, 제22대 국무총리)

1) 표기 제목만 봐서는 영락없는 문학작품이다. 작품 내용은 책이 끝나는 뒤표지 안쪽에 “수평선은 현실과 꿈의 접경” 이라는 것에 응집되어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숨겨놓은 것이 있다. 그것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 독자의 몫이다. ‘너머로’가 아니라 “너머에서”가 탐색을 위한 암호다. 저자는 수평선의 접경지점에서 “세상이란 어떤 곳인가, 인간이란 어떤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하필이면 왜 수평선에서인가? “세상은 정면으로 쳐다보면 태양을 쳐다보듯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렇게 본 것을 ‘단장집’이라는 형태로 묶었다. 단장은 또 무엇인가? “시를 산문으로” 쓰고 “산문을 시보다 짧게 쓴” 것이라고 설명하며 그것을 아포리즘 형식이라고 정의한다. 이 형식의 전성기는 불란서 근대 초기의 모랄리스트들이 이루었다. 그들은 그 단어가 주는 인상과는 달리 추상적인 당위를 주장하근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과 심리와 습속을 예리하게 분석·탐구하여 신랄한 풍자와 현란한 수사로 극도로 응축·조탁 된 강력하고 함축성 있는 문장,” 즉 단장으로 표현했었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나라에는 그런 문풍이 없다. 그 문풍의 진작을 위해 그는 한 모형을 제시하는 것이 목적임을 밝히고 있다. 형식상으로는 문학에 하나의 새로운 형태를 출발시키려는 의도를 천명하고 있다.

3) 그런데, 프랑스 모랄리스트들은 새로운 표현형태를 통하여 철학적 인간학 (philosophical anthropology)을 전개한 사람들이었음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그들은 현실적 인간들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며 무엇을 의도하고 행동하는지를 연구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삶의 지도적 이념까지를 제시한 사람들이었다. 이 두 가지는 그들의 잠언들 속에 용해되어 나타난다. 그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라로슈푸코(La Rochefoucauld, 1613-80)라는 사람이다. 저자는 이 사람을 두고 “내가 라로슈푸코를 발견한 것은 나의 르네상스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이 책을 읽는데 매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짧은 단장들로 이 책이 쓰여 졌다고 해서 안락의자에 앉아 요사이 보는 댓글 식으로 읽어야할 책은 아니다. 그리고 저자의 말대로 평면적으로 읽을게 아니라 입체적으로 읽을 일이다.(XIV-7).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은 라로슈푸코의 단장집을 두고 롤랑 바르트나 스타로빈스키가 그 형식과 내용에 관해 연구한 것을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각 단장마다 고유번호를 붙여 전체가 갖는 유기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줌과 동시에 사상적 내용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단장문학의 특징이라고 보면 될것이다. 참고로, 단장의 수를 든다면, 파스칼의 『팡세』의 경우 그 숫자가 945개이며, 라로슈푸코의 잠언은 504인데 대해 저자의 것은 1,351개로 이루어져 있다.

4) 라로슈푸코의 단장 중에 유명한 것 하나만 들자면, “미덕은 위장된 악덕”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 아래 amour propre (자존심) 라는 사상적 기본 개념을 깔고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저자의 단장은 “자존심만 있지 자기 스스로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IX-15)는 단장이리라. 그런데, 라로슈푸코의 이러한 잠언은 오랜 신학적·철학적 전통과 배경을 가진 것이다. 17세기 프랑스 모랄리스트들의 연원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세계와 신의 세계의 대칭철학에 맥이 닿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의 세계와 연관되는 amor dei와 인간세계와 연관되는 amor sui의 구분은 뒤에 카톨릭의 얀센주의에 의해 그대로 전승되었던 것인데, 몽테뉴로부터 파스칼 라로슈푸코와 그 외 그 범주에 속하는 여러 사상가들이 모두 얀센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의 연구와 사색범위는 매우 넓었다. 그 넓은 것은 대상으로 친다면 moeurs(습속)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는 18세기에 들어와서 몽테스뀌에와 룻소에 의해 승계되고 19세기에 들어오면 토크빌에 의해 하나의 절정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는 Stanislaw J. Lee의 『The Uncombed Thought』이라던가 Mikhail Turovsky의 『Itch of Wisdom』등이 있다.
저자가 쓴 <수평선 너머>를 읽어보면, 앞에 든 그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녹아들어 있음을 직감하게 되는데, 전혀 종교적인 배경을 갖지 않은 저자가(“나는 무신[無信] 주의자다.” (XXVIII-105) 그자신의 창의적인 잠언에 어떻게 이를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 경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그는 형식만을 답습했을 뿐이다. 그리고 내용을 더한 그 형식의 모델로서는 라로슈푸코에 더하여 니체 또한 있었다. 저자가 “평생을 통해 스승다운 스승이 없던 내게 스승이 있다면 니체다”(XXXI-40)라고 고백하고 있다. 저자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 주로 거의 문체를 길러준 책으로 꼽고 있는데, 내용과 관련해서는 아마도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것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왜냐하면, 니체가 라로슈푸코의 영향을 받아 쓴 책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저자가 쓴 단장집의 저변사상은 종교가 아니라 “문화주의”(xxIX-19)라고 천명하고 있다. 이 개념은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인공의 자연”(xx-1 )이라는 단장에 잘 표시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문화는 인공의 자연이라는 뜻이리라. 이는 noble savage(고귀한 야만)의 닥트린에서 떠났다는 선언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낭만을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생각이 자칫 빠지기 쉬운 꿈을 경계한다. “예술의 주성분은 꿈”(XX-4)이라고 하면서도 꿈을 경계하라고 남들에게 말하면서 자신에게도 충고한다. 유토피아는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을 보는 데에 시정신이라 부르는 낭만적 열정은 꼭 필요한 것으로 주장한다. 가슴은 머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 자체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고 쓴 파스칼의 생각과 결부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시정신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 바로 현실과 꿈이 마주치는 접경인 수평선이다.

5) 그 좌표에서 제일 먼저 묻는 것이, 인간에 대한 정체성이다. 이에 대한 그의 답은, “인간은 파이(π)”(I-1)라는 것이다. 대충 짐작은 가는데 딱 떨어지는 답이 없다는 규정이다. 논증기하학에 그처럼 심취하면서 수학의 엄밀성과 정확성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 저자에게 인간의 끝 간 데를 모른다고 규정하는 것은 여간 모순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단장들의 전체를 놓고 보면, 끝이 없다는 것 자체를 명증한 것이 바로 수학의 엄밀성이며 그것의 현실태가 인간이라고 한다면, 인간이란 획일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를 나타내고자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이르면 파스칼이 연상된다. 그렇다면 집합적이고 보통명사로 표현되는 “사람” 대신, “나”를 천착하면서 “너” 즉 다른 “나”를 이해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의 초상을 그리면서 “나는 오리지널 (original)이다”라고 규정하는데, 여기 흥미로운 것은 그 original이라는 단어의 첫 글자가 대문자로 표시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세상을 천착해 들어가는 실마리가 된다. 나 속에 너라는 다른 나가 있고, 그 다른 나 속에 나인 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의 이런 견해는 역사사회학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서계질서가 핵심인 사회에서는 추상명사와 집합명사가 발달하지 않는다. 그 반대가 되는 것이 평등사회의 질서에서이다. 이렇게 본다면 저자가 규정하는 인간관계라는 것은 귀족주의적인 것과 민주적인 것이 결합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문학적으로 말한다면 시와 산문의 결합이라 할 것이다.

6) 이런 인식의 기초에서 저자는 1세기의 세월에 가까워 오는 삶을 살면서 그 삶의 현장을 이루는 한국 사람들의 인간상을 분석한다. 그것은 “…나 외에는 아무와도 경쟁하지 않는” (XXVIII-22) 사람이 분석하는 것이다. 자기의 눈으로 보는 성취를 추구할 뿐 남의 눈으로 보는 성공을 거절하는 사람의 분석이다. 광기(狂氣)가 모자라고 잡기(雜氣)가 없는 사람의 분석이다. 그리고 또한 시인이 되기에는 너무나 수학적인 인간의 분석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은연중에 감성과 이성의 종합으로 이루어 진 것이 세상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으로 여겨진다. 인간은 머리만으로는 살지 않는다는 파스칼의 철학과 상통하고 있는 듯하다. 가슴은 머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 자체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파스칼의 주장이다. 이렇게 연관시켜 본다면, 역사적으로 한 시대는 그 시대의 독특한 본능(instinct)을 가진 것으로 전제할 수 밖에 없다. 이때 본능이라는 것은 생물학적 의미는 아니다. 즉각성을 가진 의미구조의 발현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 기반을 두고 본 한국 사회를 저자는 “엉망진창”이라고 본 흔히 삶이 뜻대로 안 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저자의 판단이 첨가된 엉망진창은 “모든 인간을 위선자”(I-19)라는 충격적인 선언이 기초가 된 표현이다. 위선자는 또 무엇인가. 가면을 쓴 존재라는 것이다. 가면을 쓴 존재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 드라마이다. 드라마의 배우들은 모두 인격이라는 어원을 이루는 persona(가면)이다. 위선자가 다시 가면을 쓴 배우들의 드라마를 보고 즐긴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그런 장에서 나라가 안정되는 꼴은 두고 못 본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저자는 “한국의 드라마티시즘(dramaticism)”(XVII-11)이라고 과감히 명명한다. 이어서 저자는 “북한을 흉볼 것도 없다. 북한의 모습은 우리 민족의 자화상이다. 남한도 저련 환경에 처하면 꼭 저렇게 될것” (XVII-12) 이라고 말한다. 국민은 그렇다 치자. 그러면 그런 인간들의 사회에서 지도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지도자는 신화가 있어야 한다” (xvii-14)고 강조하는데, 이는 전형적인 반어법과 역설법을 쓴 단자으로 보인다.전후의 맥락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마키아벨리가의 “~처럼 보여야한다”는 것과도 다르고 베버가 말하는 카리스마와도 같지 않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이때 신화라는 것은 제 정신 나간 드라마의 속물풍이라고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관객본능을 가진 대중이란 책임이 없음으로 방자할 뿐만 아니라, 그런 관객속성을 가진 대중이 바라는 지도자는 재미의 대상일 뿐임이다. 재미가 없으면 돌아서는 양태, 그것을 저자는 민중독재라고 부르며 이는 1인 독재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고 분석한다.
저자가 말하는 드라마티시즘은 얼핏 한때 관심을 끌었던 대중반항론을 연상시킨다. 그 철학은 기본적으로 지적권위가 사라진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개인마다 자기 생각에 함몰될 수밖에 없는 이른 바 공적 영역이 배제된 개인주의(individualism)의 결과를 두고 말하는 대중이며, 그들의 사견을 종합한 여론(public opinion)이란 것은 기실은 유령(phantom)에 불과한 의미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저자는 그런 분석과 맥을 달리한다. 그가 보는 한국인의 가슴의 습속은 머리의 습속으로서의 이성이 거의 증발해 버린 양태이다. 자경심(自敬心=self-respect)이라고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이 자존심(自尊心=pride)만 가진 존재로 보인다. “나를 등진 채 나를 바라보는 사람” (IX-21)들 뿐이라는 얘기다. 이런 인간의 정체는 남의 눈으로 보는 자신일 뿐이다. 이런 인간을 그는 바보로 칭하며, “바보들의 세상에서 나 혼자 바보가 되지 않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V-4)고 토로한다. 어느 사상가의 말대로, 세상이 다 미친 판에 자기 혼자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그도 역시 미친 사람이라고 묘사한 것을 저자는 “여간 힘들지 않다”는 표현으로 완화시키고 있기는 하다. 그런 바보를 그는 다른 말로 속물이라고 부른다.
속물들의 지식은 SNS를 통한 댓글 정도라고 보면서, “핸드폰은 속물들의 필수품” (V-40)으로 규정하고 저자 스스로는 그것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자신 있게 자기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을 그는 관찰한다.
더 구체적으로 저자는 식자(識者)들에게도 눈을 돌린다. 지식이 많은 사람들은 많으나 지혜와 양식을 가진 사람들이 드물다는 것을 지적한다. 지혜와 양식은 상상력과 이성력을 겸비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조건을 겸비한 사람을 저자는 “머리 좋은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그런 사람들은 이제 바보가 된 형편임을 지적한다. “머리가 좋으면서 나쁜데 쓰지 않는 사람이 더 큰 바보인 세상” (XIII-31) 이라는 역설적인 진단을 한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생각”이 증발되어버린 사회로 해부된다.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을 줄도 모른다” (XIV-3)는 기막힌 형실을 고발한다.
지성인 또는 지식인의 범주에 속하는 언론은 또 어떤가. “알고도 안 쓰는 것,” “모르고 못 쓰는” 횡포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지금의 언론이라고 본다. “신문기자들은 기자의 특권에 도취되고 마취되어 신문의 폭력성에 대한 자의식이 마비되기 쉽다”(XXII-36)
면서, “하늘에 지은 죄는 빌 데가 없고, 신문기자의 더러운 손은 씻을 물이 없다” (XXII-34)고 지적하면서 저자는 그의 오랜 언론인으로서의 경험에 따라 그렇게 강력히 경고하고 있다. 이로서 저자는 한국사회의 반지성적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7) 평자의 이런 읽기를 근거로 해서 종합적으로 『수평선 너머에서』를 생각해 보면, 한국인에 대한 우울한 감정을 떨치기가 힘들다. 프랑스의 모랄리스트들은 대체적으로 사적이식(self-interest) 추구가 새로운 습속(moeurs)로 지배해 가는 현상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탐구 했던 것인데, 그것이 현실이라면 차선의 차원에서 그것을 인정하는 태도를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그 현실이 얼핏 보아 “엉망진창”인듯 하나 묘하게도 나름의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라로슈푸코는 신앙을 잃은 인간들이 각기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적어도 러바이어탄 (Leviathan)과 같은 절대주의 질서는 피해갈 수 있다는 전망은 가지고 있었다고 피력하며 그것이 피에르 니콜 (Pierre Nicole)에 의해 경제생활에서 확인 되면서 급기야 스코트랜드 학파에 연결됨으로써 아담 스미스의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명제로 근대 경제사상의 출발점을 이루었었다. 그리고 이는 사회구조적으로는 시민사회(civil society) 출현의 계기가 되기도 했었다. 이를 참조해서 보건데, 지금 저자가 지적하는 드라마티시즘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라고 하면, 그 나름의 어떤 질서를 만들어 낼것이라고 보는지 의문이 생긴다. 가면 뒤에 숨은 ‘내’ 가 모조리 ‘남’이 되어버린 조건 아래 어떤 질서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의 단서는, “나는 입법취미가 있다” (XXX-38)는 대목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 취미는 현실과 꿈의 경계선에 선 바다 사나이의 입법취미인 것이다. 흔치 입법역할을 말할 때, 바다에 비유해서 말하는 사상가들이 많다. 입법자는 대해에 선 항해사와 비슷하다. 그는 그가 항해하면서 몸을 싣고 있는 배는 쳐다볼 수 있지만, 그 구조를 바꿀 수도 없고, 바람을 일으킬 수도 없거니와 발밑에서 거센 파도를 쳐 올려 보내는 바다를 진정시킬 수도 없다. 입법자의 한계상황이다. 이를 두고 저자인 이 항해사는, 그 상황을 따라다니는 시파(時派)가 아니라 벽파(辟派)의 사회를 그린다. 현실에서 건질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뜻으로 이해 된다.
그가 말하는 벽파란, 대중과 다수와 군중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인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자유란 반항과 동의어”(XXX-61)라고 규정한다. 고독한 반항인, 그것이 자유인이다. “어려운 수학문제의 정답을 다수결로 정하는 것”과 같은 민주주의, 그 “대책 없는 유행병”을 거부하고 차라니 볼테르가 말하는 “합리적 독제주의”에 향수를 느끼는 반어법을 쓴다. (XVII-2~6) 고독한 반항인인 자유인이 어떤 독재든 독재를 창양할 이유가 없다. “사람이란 자유를 오래 견딜 힘이 없다”(XVII-20)고 한 단장을 보면 뜻하는 바가 무엇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을 견뎌 내려면, 중심(衆心)이 아니라 중심(重心)있는 인간, 각기 색깔 있는 인간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혼자만 있다면 자유는 필요 없다.”(XVII-21) 하지만, “사람도 비슷하면 화합되지 않는다.” “설탕은 소금으로 더 달고, 빨강은 검정으로 더 붉다“ (XXIII-26~8). 저자는 자기 안에 자랑할 것이 있는 사람들의 사회를 원하고 강조한다. 그것이 자유인의 사회라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 사람들은 돈으로 주조된 자유 밖에 모른다는 암시를 던지는 것인가도 싶다. ”돈은 칼이다. 모든 관계를 가장 잘 끊는 칼은 돈“(VII-49)이라고 단언하는 그 함의는 자유의 상실이며 자유인의 말살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그러나, ”자유는 부자유다.“ (xvii-47) 무슨 말인가? ”자유는 선택을 강요하고 선택은 책임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견뎌 내는 사람이 자유인이고 강자다. 이런 강자는 자기편이 없는 사람이다. 패거리는 약자가 만드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 약자를 강자라 부르는 착각을 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힘을 빼고 또 뺄 수 있는 사람이 강자라는 것을, 평등에서 평준으로 그리고 평준에서 평범으로까지 전락해 버린 약자들은 이를 모른다고 통쾌하게 지적한다. 저자는 정말로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세상에 울분을 토한다. 똑똑한 바보들이 빚어내는 드라마에서 아쉽게도 저자는 의도되지 아니한 그 어떤 질서의 싹도 쉬이 찾아내지 못한다. 지금은 자유인이 질서를 만들어낼 차례임을 강조하고 거기에 그의 꿈을 걸고 있다. 편집국에서 매일매일 세상을 편집해 온 현실주의자의 처절한 꿈이다.

8) 이렇게 속 터지는 현실주의자의 꿈은 이 책의 제2부에 자신을 상대로 그린 초상에서 전개된다. 그것을 위해 우선 저자는 표지 뒷면에 사진이 아닌 초상화로 자신을 내 보인다. 자기초상을 밝히는 것은 모랄리스트들의 한 전통이기도 하다. 자기를 숨기지 않는다는 것은 남들에 의한 평판을 가지고 자신을 규정하지 않고 정직하게 자기를 들어내면서 당당하게 생각하는 바를 노출시킨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모랄리스트들은 사색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아테네의 시민들과 같은 존재들이다. 저자가 거짓말쟁이와 배신자와 얌체를 가장 싫어하는 세 종류의 인간들이라고 들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지면의 한계 때문에 저자가 그린 자기의 초상을 길게 설명할 여유는 없이, 그가 자신을 두고 화가의 감각으로 그려낸 초상의 데생만을 열거해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이러하다: 보주주의자, 권위주의자, 왕당파, 소수의견파, 독재자, 자유주의자 등. 맞다. 그 모두가 그에게 해당되는 규정이다. 그러나 평자는 그가 시사하고 있듯이 낭만적 현실주의자라는 것이 가장 알맞은 이름이라 여긴다. 이때 낭만이란 시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낭만적 현실주의자의 단장집을 통하여 평자는 한국의 라로슈푸코가 최초로 탄생된 기쁨을 누리거니와 다만 라로슈푸코가 출입했던 마담 싸블레(Mme. de Sablé) 의 쌀롱과 같은 자유인들의 공화국이 또한 탄생하기를 기대해 본다.﹑

* 이 글은 『월간 대한언론』8월호에 게재된 글로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시합니다.

김성우 지음
카테고리 산문 | 출간일 2018년 3월 27일
사양 변형판 126x204 · 244쪽 | 가격 16,000원 | ISBN 9788932030852

김성우 일반저자

경남 통영시 욕지도에서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한국일보사에 입사하여 파리 특파원, 편집국장, 주필, 논설 고문 등을 거치며 44년간 언론계에 종사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명예 시인’이며 유일한 ‘명예 배우’이다. 지은 책으로 자세히 보기

1 + 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