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노트] 나에서 우리로, 애도 이후의 공동체를 상상한다

^CBC519AA6176E0C97248DA51DDBBB0FCA74C543A67CD2B38E3^pimgpsh_fullsize_distr

 

 

 

 

 

 

 

 

 

 

 

 

 

 

 

 

 

 

 

 

 

 

 

 

 

 

 

 

나에서 우리로, 애도 이후의 공동체를 상상한다 

강남역 20대 여성 살해 사건의 피해자를 추모하며

글_에디터 이파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말을 어떻게 붙일 수 있을까요? 피해자의 유족, 지인 분들에게 깊은 위로의 말씀 드립니다.
강남역 살인 사건이 일어난 뒤 10번 출구 앞에는 자발적인 추모 공간이 형성되었습니다. 우리는 피해자에 대한 억울하고 안타까운 마음과 거의 동시에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나였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위협과 폭력의 상황에 노출되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여성에게 좀더 많은 규제와 한계를 가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많은 논쟁이 벌어졌고 그 자체로 유의미한 과제를 남겼지만, 이 자리에서 저는 주디스 버틀러가 말한 ‘애도의 힘’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버틀러는 『젠더 허물기』에서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존속과 생존의 문제로 연결하고자 시도했습니다. 2004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젠더 허물기Undoing Gender』는 9․11 테러가 일어난 뒤 ‘살 수 있는 삶’이나 공동체의 윤리적 관계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버틀러가 그것을 심화해 담아내고, 이론적 성찰에서 현실 참여적으로 나아가는 버틀러 이론의 전환을 보여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haaretzjb

 

 

 

 

 

 

 

 

 

 

 

(사진_주디스 버틀러)

 

버틀러는 최근 2015년 파리 테러를 마주한 뒤에도 애도의 물결이 국가주의, 국가폭력의 구조로 귀결되는 일에 대해 애석함을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강남역 살인 사건을 통해 저는 버틀러가 이야기한 ‘애도의 힘’이 드러남을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너’가 아니라 ‘우리’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정치적, 윤리적 지평으로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애도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만들고 살 수 있는 삶, 혹은 환대받는 삶을 성찰하게 합니다. 이처럼 애도에 관한 주디스 버틀러의 발언은 한번 곱씹어볼 만합니다. 『젠더 허물기』의 일부 내용을 발췌해 소개해드립니다.

 

우리 중 일부는 개별적으로 폭력의 대상이 되지 않았더라도,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우리는 모두 폭력의 대상이 된다. 이 말은 우리 몸의 사회적 취약성 때문에 우리가 어느 정도는 정치적으로 구성된다는 의미이다. [……]

언제 애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지,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을 충분히 애도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래도 그 의미가 누군가 그 사람을 잊었다거나, 뭔가 다른 것이 나타나 그 사람 자리를 대신하는 게 아닌 건 확실하다. 애도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누군가 겪고 있는 상실이 당신을 변화시킬 것이고, 어쩌면 당신을 영원히 변화시킬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애도가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애도는 그 결과를 미리 다 알 수 없는 어떤 변화를 겪기로 동의한 것과 관련된다. [……]

 

우리는 일시적인 무언가를 겪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에 관한 중요한 뭔가가 드러날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과 우리가 맺는 유대를 설명하는 무엇이, 이런 유대가 자아감을 형성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무엇이, 그리고 그런 유대를 상실해버리면 근본적 의미에서 평정심을 잃게 되는 중요한 뭔가가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슬픔은 개별적인 것이고 우리를 각자 외로운 상황으로 되돌린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슬픔이 자아를 구성하는 사회성, 즉 복잡한 질서를 가진 정치 공동체를 사유할 기반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

슬픔의 문제로 되돌아온다면, 누군가 어찌해볼 수 없는 상황을 겪고 미친 듯 슬퍼서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으로 되돌아온다면, 우리는 슬픔이 그 안에 체현된 삶의 근본적 사회성을 이해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처음부터 우리가 존재한 방식, 그리고 우리가 몸의 존재인 까닭에 이미 우리 외부에 놓여 우리만의 것이 아닌 삶에 연루되는 방식을 이해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슬픔에서 얻는 뭔가 중요한 것이 있을까? 슬픔에 머무는 것에서, 겉보기에는 참을 수 있어 보이는 슬픔에 놓인 채로 폭력을 통한 슬픔의 해소를 추구하지 않는 것에서 얻어지는 중요한 무언가가 있을까? 슬픔을 국제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틀의 일환으로 유지함으로써 정치적 영역에서 의미 있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까? 우리가 상실감에 싸여 있다면 그 상태는 공포감처럼 우리를 수동적이고 무력한 상태에 두는가? 아니면 인간적 나약함을 느끼게 하여 서로의 육체적 삶에 대한 우리 모두의 총체적 책임감으로 되돌아가게 하는가? 그런 취약성을 배제하고 추방하려는 시도, 다른 모든 인간적 배려를 희생하더라도 안전해지려는 시도는 분명 방향을 잡고 나아갈 길을 찾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자원 하나를 뿌리째 뽑는 것이기도 하다.

슬퍼한다는 것, 슬픔을 정치적 자원으로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수동성이나 무력감에 몸을 맡긴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군사적 공격과 점거, 갑작스런 선전 포고, 그리고 경찰의 잔혹 행위와 같은 취약성의 경험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겪는 취약성을 생각해보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의 생존 자체가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될 수 있고 그런 사람들에 대해 우리에게는 최종 통제권이 없다는 것은 삶이 위험에 처했다는 뜻이고, 정치는 어떤 형태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조직이 전 세계적으로 위험에 놓인 삶을 가장 잘 지속시키려 하는지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9 + 3 =